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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탄차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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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스탄차 1세는 12세기 시칠리아 왕국의 여왕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와 결혼하여 시칠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의 결합을 이끌었다. 그녀는 조카 구리에르모 2세의 후계자 지명 이후 왕위 계승자로 결정되었으나, 시칠리아인들의 반대로 인해 남편과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탕크레디와의 대립, 하인리히 6세의 시칠리아 정복, 아들 프리드리히 2세의 출산, 섭정 통치 등을 거쳐 1198년 사망했으며, 로마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프리드리히 2세의 후견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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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탄차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군주호시칠리아 여왕
이름코스탄차
로마자 표기Costanza d'Altavilla, Costanza di Sicilia
시칠리아 여왕 코스탄차와 황제 하인리히 6세
시칠리아 여왕 코스탄차와 황제 하인리히 6세
출생일1154년 11월 2일
출생지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
사망일1198년 11월 27일
사망지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
매장지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 대성당
왕가오트빌가
왕조오트빌 왕조
통치 정보
즉위일1194년 12월 25일
이전 군주구기에르무 3세
다음 군주피디리쿠 1세
가족 관계
아버지루체로 2세
어머니베아트리체 디 레테르
배우자하인리히 6세
자녀프리드리히 2세

2. 생애

1154년 루지에로 2세가 사망하기 전에 태어났다. 1186년 1월 27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하인리히 6세와 밀라노에서 결혼했다. 하인리히 6세는 콘스탄차보다 10살 어렸다. 늦은 나이에 결혼했기 때문에, 13세기 후반 이후부터 콘스탄차가 수녀였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단테도 『신곡 천국편』 제3가 109행 이하에서 "당시의 구전에 따라 콘스탄차를 수녀로 삼았던 것 같다"[2]라고 썼다.

1194년 40세의 늦은 나이에 아들 프리드리히 2세를 출산했다. 고령 출산이었기 때문에, 출산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도시 광장에 설치된 천막 안에서 귀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3]

2. 1. 출생과 상속녀 지명

콘스탄차 1세는 1154년 아버지 루지에로 2세가 사망한 후 태어났다[1]. 구리에르모 2세에게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1185년 귀족들에 의해 왕위 계승자로 정해졌다[1]. 그러나 1186년 1월 27일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하인리히 6세와 밀라노에서 결혼했다.

2. 2. 하인리히 6세와의 결혼

1186년 1월 27일, 콘스탄차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인 하인리히 6세와 밀라노에서 결혼했다.[1] 하인리히 6세는 21세였고 콘스탄차는 31세로, 10살 연하였다.[2] 콘스탄차는 1154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구리에르모 2세에게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1185년 귀족들에 의해 왕위 계승자로 정해져 있었다.[1]

1189년 11월 1일 구리에르모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콘스탄차 또는 하인리히 6세가 왕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시칠리아인들은 외국으로 시집간 공주나 황제에게 지배받는 것을 싫어하여 1190년 1월 탕크레디를 왕으로 추대했다.[2] 하인리히 6세 부부는 1190년 교황에게 대관을 받고 시칠리아를 공격했으나, 나폴리에서 대패하고 콘스탄차는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었다.[2]

1194년 탕크레디가 사망하고 구리에르모 3세가 왕위를 이었지만, 하인리히 6세는 다시 시칠리아를 공격해 왕위를 빼앗았다. 이후 하인리히 6세와 콘스탄차는 대관식을 통해 정식으로 시칠리아 왕과 여왕이 되었다.[2]

2. 3. 시칠리아 왕위 계승 투쟁

1189년 11월 1일, 구리에르모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했다.[1] 콘스탄차와 그녀의 남편 하인리히 6세가 왕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시칠리아인들은 외국으로 시집간 공주나 황제의 지배를 원치 않았다.[1] 이에 1190년 1월, 구리에르모 2세의 사촌인 탕크레디가 왕위에 올랐고, 교황의 승인까지 받았다.[1]

하인리히 6세와 콘스탄차는 1190년 교황에게 대관을 받고 시칠리아를 침공했으나, 탕크레디의 저항으로 나폴리에서 크게 패했다.[1] 콘스탄차는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났다.

1194년 2월 20일, 탕크레디가 사망하고 구리에르모 3세가 왕위를 이었지만, 하인리히 6세는 다시 시칠리아를 공격해 왕위를 차지했다.[1] 이후 하인리히 6세와 콘스탄차는 정식으로 시칠리아 왕과 여왕으로 즉위했다.[1]

2. 4. 시칠리아 여왕 즉위와 통치

1189년 11월 1일, 조카 구리에르모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콘스탄차와 그녀의 남편 하인리히 6세가 왕위를 계승해야 했다.[1] 그러나 시칠리아인들은 외국인 통치자를 원치 않아 1190년 1월 구리에르모 2세의 사촌인 탕크레디를 왕으로 추대했고, 교황도 이를 승인했다.

하인리히 6세와 콘스탄차는 1190년 교황에게 대관을 받고 시칠리아를 침공했으나, 탕크레디에게 패하고 콘스탄차는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었다.[1] 1194년 2월 20일 탕크레디가 사망하고 구리에르모 3세가 즉위하자, 하인리히 6세는 다시 시칠리아를 공격해 왕위를 차지했다. 하인리히 6세와 콘스탄차는 대관식을 통해 정식으로 시칠리아 왕과 여왕이 되었다.

1195년 부활절, 콘스탄차는 남편이 없는 동안 시칠리아의 정무를 독단적으로 처리하고 문서를 교부했다.[4]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남편에 대한 모반을 꾀했다는 주장도 있다.[1]

1197년 9월 20일 남편이 사망한 후, 콘스탄차는 아들 프리드리히의 섭정으로서 실질적인 통치를 맡았다.[4] 그녀는 독일인을 싫어하여 하인리히 6세가 시칠리아에 봉토를 준 독일 귀족들을 추방하려 했다. 특히 독일 최고 지휘관 마르크바르트 폰 안바일러를 추방했는데, 이는 독일 귀족들을 프리드리히의 적으로 만들었고, 이후 10년 동안 시칠리아는 내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198년 프리드리히가 시칠리아 왕위를 계승했고, 같은 해 콘스탄차는 사망했다.[5] 그녀의 유언에 따라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프리드리히의 후견인이 되었다.

2. 5. 죽음과 유산

1197년 9월 20일, 남편 하인리히 6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콘스탄차는 아들 프리드리히의 섭정으로서 실질적으로 정무를 맡게 되었다.[4] 그녀는 독일인을 싫어하여, 하인리히 6세가 시칠리아에 봉토를 부여한 독일 귀족들을 추방하려 했다. 독일 최고 지휘관이었던 마르크바르트 폰 안바일러(Markward von Anweiler) 등도 시칠리아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독일 귀족들은 프리드리히의 적이 되었고, 이후 10년 동안 시칠리아는 내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198년 프리드리히는 시칠리아 왕위를 계승했고, 같은 해 콘스탄차는 사망했다. 그녀의 유언에 따라 로마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프리드리히의 후견인이 되었다.[5]

참조

[1] 서적 Lexikon des Mittelalters Artemis & Winkler
[2] 서적 神曲 天国篇 集英社
[3] 서적 人類5000年史III――1001年~1500年 ちくま新書
[4] 서적 騎士の時代 ドイツ中世の王家の興亡 法政大学出版局
[5] 서적 騎士の時代 ドイツ中世の王家の興亡 法政大学出版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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